2024년 425(목)  오늘은 < 승가의 노래 > 종강 책거리 하는 날로

참으로 뜻 깊고 환희로운 날이였답니다~~

 

 

선원장 스님의 크신 원력으로 ...

< 붓다의 노래 108 게송 >

< 담마의 노래 108 게송 >

< 승가의 노래 108 게송 >

 < 삼보의 노래 > 가 활짝~  펴 

8년 동안의 전법의 결실이 만개 된 날이였답니다~~

 

선원장 스님께서는 부처님의 가르침(법) = 게송이다.

이 말씀을 힘써 강조 하셨고, 지금까지도 게송으로 이끌어 주신답니다.

삼보의 노래로 법계를 여시니, 

정토의 노래 ' 아미타바! ' 로

최상의 게송을 맞이하게 해 주셨답니다~ 

 

저도 오늘을 생각하면 감회가 새로운데요~

10년 전에 행불선원에 템플스테이로 처음 왔는데, 다음 날 게송낭송을 했어야 했거든요~

선원장 스님께서는 저희로서는 상상도할 수 없는 그런 경지가 아닐까 가늠해 봅니다~

게송으로 이끌어 주시는 선원장 스님이야말로 우리의 최상의 복전인 것 같습니다~

오늘, 자리를 함께 해 주신 모든 도반님들도 모두 함께 기쁨을 공유했답니다~

선원장 스님 덕분에 우리 모두는 부처님의 가피를 느낄 수가 있었답니다~~

 

항상 최상의 방편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는 

최상의 복전인 선원장 스님께

머리숙여 합장하며 정례합니다!!!

 

아미타바!

(*)(*)(*)

 

 

 

 

 

 

 

 

 

 

 

 

►►►  < 삼보(三寶)의 노래 > 총정리 강의 중에서 ...

 

 

 

 

 

*<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음 경 > 

 

30명이 쌍쌍이 야유회를 갔다. 한 사람이 기생을 사서 함께 갔는데,

휴식을 취하며 잠을 자는 사이에 그 여인이 사람들의 귀중품을 챙겨 달아났다. 

잠에서 깨어난 사람들이 이 여인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부처님이 나무 밑에 앉아서 명상하는 모습을 보고, 물었다.

방금 여기 여자 하나 지나가는 것 못 봤습니까?

이때, 부처님께서 이 말씀을 하셨다.

 

" 도망친 여인을 찾는 것과 자기 자신을 찾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합니까? "

 

이 말을 듣고 사람들이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때, 부처님께서 처음 설해주신 법문이 <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음 경 > 이다.

윤회의 시작은 알 수 없다. 왜?

지금까지 윤회를 하도 많이 해서,

그대들이 지금까지 윤회하면서 목이 잘려 흘린 피가 저 바닷물보다 더 많다.

그대들이 지금까지 흘린 눈물의 양이 저 바닷물보다 더 많다.

 

이 때, 또 < 무아경(無我經)을 설해주셨다.

 

몸은 내가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자아가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면,

애착에서 벗어나고

고통에서 해탈한다.

 

이 게송을 듣고 바로 30명이 아라한이 됐다.

 

깨달음을 얻게 되는 계기가 대부분 < 게송 > 듣고 깨닫는다.

 

열심히 수행하는 것은 인(因)을 충실히 하는 것이고

게송을 만나는 것은 연(緣)을 충실히 하는 것이다.

 

(因)은 자력이고 (緣)은 타력이다.

자타일시(自他一時) 자력과 타력이 만나야 깨달음을 얻는 거다.

 

8년 전에 이 사실을 깨닫고 < 게송 > 을 모았다.

초기불교 108게송을 모아서 < 붓다의 노래 >

대승불교 108게송을 모아서 < 담마의 노래 >

선불교 108게송을 모아서 < 승가의 노래 >

셋을 합쳐서 < 삼보(三寶)의 노래 > 다.

 

왜?

게송을 만나지 못하면 깨달음을 못 얻는다.

부처님께서 무슨 말씀을 하셨냐면,,,

심지어 사리자 같은 지혜제일인 상수제자도

< 붓다의 게송 > 을 만나지 못 했으면 수다원과도 얻지 못 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의 수행과 부처님의 가피, 

게송이 부처님의 가피중에 최고의 가피다.

이걸 모아서 < 삼보의 노래 > 를 8년 전에 시작해서

오늘 총정리 하는 시간을 갖으니까,

감회가 새롭다.

( 스님, 감사합니다 )

( 짝짝짝짝~~ !!! )

 

여러분들 덕분에 여기까지 온거다.

왜냐면 가르치다 보니까 이걸 알게 된거다.

아니, 열심히 공부하고 꾸준히 수행하는 스님들이나 재가자들이 많은데,

왜?

(道) 터졌다는 소리는 안 들리지? 

여기저기서 터졌다는 소리 들려야 되는데, 왜 안들리지하고 고민을 한거다.

해 봤더니, < 게송 > 을 경시했다.

게송을 경시하면 안 된다. 

< 게송이 굉장히 중요한거다. >

게송을 듣고 깨닫는 거다.

 

초기에는 사람들이 무아경을 듣고 깨달았다.

그래서 초기에는 핵심 게송이 < 무아경(無我經) > 이다.

 

'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다 ' 라고 관찰을 해야 애착에서 조금씩 벗어나기 시작한다.

이게, < 근본 가르침 > 이다.

그럼, 이 몸과 마음이 내가 아니면 뭐냐?

나의 < 아바타 > 다.

 

 

 

 

 

 

 

* 응작여시관(應作如是

이와 같이 관찰하라.

 

모든 존재는 꿈 · 아바타 · 물거품 · 그림자 · 이슬 · 번갯불과 같다.

세계는 세계가 아니요(卽非), 그 이름이(是名) 세계일 뿐!

몸도 아바타!

마음도 아바타!

이 세상은 가상현실!

이와 같이 관찰하라.

 

불교는 관찰의 종교다.

그럼, 수행이 뭐냐?

관찰이 수행이다.

 

< 무아경 > 에서도 몸도 내가 아니고, 마음도 내가 아니라고 관찰하라 그랬다.

대승경전의 대표적인 < 금강경 > 에서도 모든 존재,

정신적 존재 물질적 존재 모든 존재,

몸과 마음은 꿈 · 아바타 · 물거품 · 그림자 · 이슬 · 번갯불과 같다.  

응당 이와 같이 관찰하라.

금강경을 통털어서 가장 중요한 한 글자가 < (觀)  > 이다.

관찰하라.

어떻게 관찰해요?

" 이 몸이 아바타!

이 마음도 아바타!

이 세상은 가상현실! "

이라고 관찰해라.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 금강경을 실천 > 하는 것이다.

 

* 즉비(卽非) 시명(是名)

삼천대천 세계는 삼천대천 세계가 아니요(卽非), 그 이름이(是名) 삼천대천 세계일 뿐!

장엄은 장엄이 아니요, 그 이름이 장엄이다.

중생은 중생이 아니요, 그 이름이 중생일 뿐!

부처는 부처가 아니요, 그 이름이 부처일 뿐!

 

부처님께서 똑같은 말을 계속 반복하고 계신다.

부처님께서 반복하는 이유가?

아무리 말을 해도 말귀를 못 알아 들으니까,

어려운 말도 아닌데 못 알아 들으니까

경전은 반복학습이다.

동어반복(同語反覆)이다.

 

지금부터 열심히 수행해서 부처님의 깨달음을 얻어야지 하지 말고,

< 부처님의 깨달음을 활용 > 하면 된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활용하는 게 뭐에요?

 

" 이 몸이 아바타! "

" 이 마음도 아바타! "

" 이 세상은 가상현실! "

 

여기서 부터 시작하는 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을 활용하는 것이다.

이것이 부처님의 깨달음의 내용이다. 

 

 

 

 

 

 

 

* 아는 만큼 보인다 (一水四見)

 

참나(眞我)는 무아(無我)다  < 초기불교 >

무아(無我)에서 대아(大我)로  < 대승불교 >

무아(無我)에서 시아(是我)로  < 선불교 >

무아(無我)에서 초아(超我)로  < 정토불교 >

 

이게 바로 일수사견(一水四見)이다.

불교가 이런 순서대로 발전해 왔다. 진화해 왔다. 인류의 역사가 진화의 역사다.

 

참나(眞我)는 무아(無我)다.

무아의 입장에서 보면 실체가 없다는 거다.

산도 없고 물도 없다. (色卽是空)

무아를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게, 

그럼, 진짜 내가 없다는 소리냐?

지금 이 몸뚱이는 뭐냐?

이 몸뚱이는 나의 < 아바타! > 다.

 

실체가 없고 작용만 있다. 

 

마지 꿈처럼, 꿈이 실체가 있어요 없어요?

있긴 있다.

그런데, 실체를 꺼내봐라 하면 꺼낼 수 없다.

현상으로 그냥 지나갈 뿐이다. 

< 아바타 > 도 마찬가지다. 

실체는 없고 현상만 있어서 작용할 뿐이다.

그래서, 진공(眞空)은 무(無)가 아니라, 묘유(妙有)다.

이런말이 나오는 거다.

 

무아(無我)에서 대아(大我)

고정된 내가 없기 때문에 어떠한 나도 만들 수 있다. 

이게 대아(大我)다.

부처도 될 수 있다.

보살도 될 수 있다. 

거지도 될 수 있다.

부자도 될 수 있다.

이게 바로 무아(無我)에서 대아(大我)로 가는 대승불교다.

산이 물도 되고 물이 산도 된다.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

공즉시색(空卽是色)

텅 비었기 때문에 무엇으로든 채울 수 있다.

부처도 될 수 있고 보살도 될 수 있고 축생도 될 수 있다.

무엇이 될 것인가?

나의 행위가 나다. 

 

무아(無我)에서 시아(是我)로 가는 거다.

불행시불(佛行是佛) 부처의 행위가 부처다.

아행시아(我行是我) 나의 행위가 나다.

무아에서 시아로 가는 것이 참선이다.

산은 산, 물은 물

이게 바로 금강경에서 말한 즉비(卽非) 시명(是名)이다. 

실체는 없지만 이름은 있다는 소리다.

실체는 없고 이름이 있을 뿐!

산은 뭐에요?

산이 있다 없다의 개념이 아니다. 

그냥 산은?

물은 뭐에요?

이게 시아(是我)다. 이 是자.

< = 등식 > 이다.

3x3 = 9

9x9 = 81

이소리다.

이거는 진리다.

그러니까,

산은 산 

물은 물

진리인 거다.

색즉시색(色卽是色)의 경지인 거다.

 

(禪)보다 쉬운것은 없다.

너무 쉬워서 못 맞춘다. 왜? 머리를 쓰니까.

 

아이들이 더 잘 맞춘다.

" 짝짝궁 짝짝궁 "

 짝짝궁 짝짝궁 하는 놈이 누구에요?

" 짝짝궁 짝짝궁 "

 

동어반복(同語反覆) · 동행반복(同行反覆) 은 진리다.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것뿐! 이 되는 거다.

말로 하면 이렇고,

행동으로 하면 행동으로 보여 주면 되는 거다.

 

누가 와서 빰을 딱 때리며, 뺨 맞은 놈이 누구냐? 하면

그 놈의 뺨을 딱 때리며, 이거다 알겠느냐? 하면 된다.

(하하하하~~ )

너무 쉽다.

뺨 맞은 놈이 누구지, 몸으로 맞았나, 마음으로 맞았나, 아니야 얼굴로 맞았나,

이러면 죽을 때까지 답안나온다.

그냥, 똑같이 하면 된다. 

하하하하

 

한단계 더 나아가서,

무아(無我)에서 초아(超我)

초월 초탈한 나, 해탈한 나

무아에서 초아로 가는 것이 정토(淨土)다.

이분법(二分法)에서 초탈한 나!

윤회에서 벗어난 나!

이게 바로 초아(超我)다 해탈한 나!

정토는 해탈게임 메타버스(가상현실)기 때문이다.

가기만 하면 해탈이다.

살덩어리 아바타, 분별 아바타가 아니고,

진공묘유(眞空妙有)의 아바타다.

산도 있고 물도 있고 에베레스트산 가고 싶으면 에베레스트산에 딱 가 있다.

생각만 하면 생각대로 " 비비디 바비디 부 " 다.

이게 진공묘유다.

이게 실체가 있는 거냐?

그건아니다.

아바타로 있는 거다.

아바타도 품질이 있는데,

최상의 품질이 진공묘유의 고품질의 아바타고

인간의 아바타는 착유(着有)다. 애착으로 존재하는 저품질의 아바타다.

정신의 아바타가 중간품질의 아바타다.

 

 

 

 

 

 

 

* 이뭐꼬? 이것뿐!

 

모든 화두는 이뭐꼬? 화두의 응용이라고 보면 된다.

표현만 조금씩 다를 뿐이지, 기본적인 골격은 똑같다.

이것뿐! 이라는 것은 무슨 소리냐?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바로 지금 여기에서, 견문각지(見聞覺知) 할 뿐!
견문각지
(見聞覺知) 하는 자는 없다.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진짜 나다!

 

관찰을 조금 풀어서 설명하면,

견문각지(見聞覺知)다.

우리가 육근(眼 · 耳 · 鼻 · 舌 · 身 · 意)을 가지고 견문각지 한다.

눈으로는 보고, 귀로는 듣고, 코 · · 몸으로는 감각하고 뜻으로는 안다.

육근의 작용을 한 마디로 표현하면,,,

견문각지(見聞覺知)고,

더 줄여서 말하면

(觀)찰 이다.

 

견견(見見)    보이는 것을 보기만 하고

문문(聞聞)     들리는 것을 듣기만 하고

각각(覺覺)  느끼는 것을 느끼기만 하고 

지지(知知)       아는 것을 알기만 할 뿐!

그럴 때, 거기에 그대는 없다. 

이것이 고통의 해탈이다.

 

부처님의 기가막힌 게송이다.

게송으로 다 깨닫는 거다.

깨닫고 나서 게송을 보면 제대로 깨달았는지 못 깨달았는지 확인 할 수가 있다.

게송의 내용이 술술 들어 오고 내가 깨달은 내용과 합치한다 이러면 제대로 깨달은 거고 내가 깨달은 것 하고 좀 다른데 이러면 잘 못 깨달은 거다.

게송이야말로 깨달음의 계기도 되고,

깨달음의 확인도 된다. 

인증을 할 수 있는 거다.

 

 

조사선(祖師禪)  성품을 보아 부처의 행을 닦을 뿐!

묵조선(默照禪)은  몸으로써 다만 앉아 있을 뿐!

간화선(看話禪)은  마음으로 오직 화두 챙길 뿐!

정토선(淨土禪)은  아바타가 아미타바 염할 뿐!

 

이게 선(禪)의 발달 과정이다.

조사선(祖師禪)

달마조사 부터 마조 도일까지 초창기의 선을 조사선이라 한다.

육조 혜능스님이 근본이 된다. 

육조단경에 보면, 수행불행(修行佛行) 부처의 행을 수행하라.

부처가 있어서 부처의 행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처의 행을 하는 자가 부처다 이 소리다.

개짓을 하면 뭐가 된다?

개가 된다 이 소리다.

 

묵조선(默照禪)은 뭐냐?

부처의 행이 근본이 뭐야?

좌선(坐禪)아니야.

그래서 좌선이 기본이 된다 그래서 묵조선이 나온 거다.

왜?

견성(見性)해서 부처의 행을 닦을 뿐! 하니까,

나중에 무슨 폐단이 나오냐면,

막행막식 하는 사람들이 나온 거다.

부처와 중생이 둘이 아니라는데 이러면서 이걸 선용해야 되는데,

악용하는 사람들이 나왔다.

그래서 이걸 차단하기 위해서 나온 것이 묵조선(默照禪)이다.

그래서,

몸으로써 다만 앉아 있을 뿐!

지관타좌(只管打坐)가 나온 거다.

 

그러다 보니까, 또 모두 앉은뱅이만 생기는 거다.

잘했냐 못 했냐가 얼마나 앉아 있었느냐? 몇 철이나 앉아 있었어?

이걸로 따지는 거다. 이것 또 폐단인 거다.

 

앉아만 있는다고 되냐?

마음가짐을 잘 삼매에 들어가야지?

그래서 나온게 간화선(看話禪) 이다.

간화선(看話禪)은 5분 앉아 있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마음으로 화두 챙기는 거야?

마음으로 오직 화두 챙길 뿐!

간화일념(看話一念)이 되는 거다.

 

여기서 더 발전한 것이 정토선(淨土禪)이다.

화두 챙겨서 한 소식 했다고 해서 완전 해탈한 것이 아니야,

다만 사바세계에서 살기가 편할 뿐이야, 여기 있는 한 돌고 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해야되?

극락정토 가는 게 최고다.

그래서 나온게,

 정토선(淨土禪)이다.

< 아바타가 아미타바 염할 뿐! >

이게 중요한 거다.

정토선을 하되, 

나도 아바타!

아미타부처님도 아바타!

사바세계도 가상현실이고

극락세계도 가상현실이다.

이걸 알고 해야 엉뚱한 곳으로 안 간다.

 

알고 보면, 

정토선(淨土禪) 이 제일 발전했다.

중국에서는 간화선에서 정토선으로 발전을 했는데,

우리나라는 그 시대가 조선시대였다. 그래서 정토선이 도입이 안 됐다.

서산대사나 함허득통 선사 일부 도입이 되긴 됐는데 그게 이어지질 못 했다.

그래서 지금도 간화선이 최고다 하지만,

사실 선(禪)의 발전 단계에서 보면 간화선이 최고가 아니라,

정토선(淨土禪) 이 최고다.

 

 

 

 

 

 

 

선정(禪 · 淨) 쌍수 : 아바타명상 x 아미타명상

 

형상에 매달리면 상(相)에 떨어지고

형상을 무시하면 공(空)에 떨어지네

다만 상(相)으로써 상(相)을 다스리니

아바타가 아미타바 염할 뿐!

 

(相)에 매달려서도 안되고 상(相)을 무시해서도 안되고 

어떻게 해야 된다?

(相)으로써 상(相)을 다스린다.

나도 상(相)이고 부처님도 상(相)이지만,

(相)으로써 상(相)을 다스리는 방편으로 써야 된다.

이게 < 지혜 방편 > 이다.

구체적인 내용이 뭐냐?

< 아바타가 아미타바 염할 뿐! >

이게 < 선정(禪 · 淨) 쌍수 > 가 되는 거다.

 

선정(禪 · 淨) 쌍수의 기본이 뭐냐?

마하반야바라밀을 염하면 참선수행 

나무아미타불을 염하면 정토수행 

참선은 제상비상(諸相非相)이라 살불살조(殺佛殺祖) 하고

정토는 이상치상(以相治相)이라 활불활조(活佛活祖) 하네.

 

이걸 제대로 알고 써야 한다.

조계산에 계시던 6조 혜능 대사께서 대중화 시켰다.

< 육조단경 > 에 보면, 마하반야바라밀을 < 구념심행(口念心行) > 하라.

구념하고 심행하지 않으면 나의 제자가 아니다 이랬다.

마하반야바라밀을 입으로 염하고 마음으로 실천하는 거다.

육조단경에 구체적으로 나와 있다.

 

마하반야바라밀과 나무아미타불을 같이 염하면

선정(禪 · 淨)  쌍수가 되서 불과를 성취하기가 쉬워진다.

 

참선은 상을 없애는데 취중해 있다.

약견제상비상이면 즉견여래라.

모든 상은 허망하다 이소리다.

 

정토에 가면,

(相)을 떠나서 상(相)을 제도할 수가 없다.

이상치상(以相治相) 상으로써 상을 없앤다 이거다.

중생제도를 하려면 상(相)이 필요하다.

그래서 불상을 모신다.

진실은 아니지만 < 방편 > 으로 필요한 거다.

상을 매달려서도 안되지만 무시해서도 안된다.

정토(淨土)는 활불활조(活佛活祖)

부처도 살리고, 조사도 살리는 게 정토(淨土)다.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 개공성불도

(*)(*)(*)

 

 

 

 

 

 

 

 

►►► 5월 일요법회 및 < 오백나한상 > 점안대법회 봉행 안내 !!!

 

2024년 5월 5일(일) 오전 10시 이천도량

티벳 네충 큰스님 초청

< 오백나한상 > 점안대법회 및 

< 업장소멸 의식 > 봉행합니다.

 

업장소멸 의식에 동참하실 분은 사무실로 신청바랍니다.

 

 

 

아미타바!

(*)(*)(*)